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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hel

 

마엘은 여성을 특별하게 하는 그 어떠한 주장도 거부하며, 스타일이나 유행에 구속되지 않습니다. 헤비츠의 새로운 여성 브랜드, 마엘을 만든 이야기.



헤비츠의 여성 브랜드는 달라야 해

디렉터(김준기) : ‘아름답고 사랑받는 여성이라면 우리 제품을 구입하세요!’ 이런 협박을 하지 않고 제품을 만들 수는 없을까, 그게 마엘의 첫 번째 문제의식이었어요.
여성은 늘 예쁘고 섹시할 것을 강요받아요. ‘크리스마스 케이크’에 빗대던 저질스러운 농담은 차치하더라도, 지금도 우리는 여성을 꽃에 비유하는 데 별다른 죄책감을 못 느껴요. 그만큼 여성에 대한 대상화가 심각한 거죠. 여성 제품 광고들을 보세요. 브랜드의 메시지는 다양할지 몰라도, 실제 제품 디자인들은 하나의 관념을 따릅니다. ‘여성 제품은 예쁘거나 섹시해야 한다’는 거고, 그래야 팔린다는 거죠. 하지만 제품을 만들고 광고를 하는 행위는 어떤 주장을 하는 것이기도 해요. 그래서 헤비츠가 만드는 여성 브랜드는 좀 달라야 하지 않을까, 그런 주문을 계속 넣었죠.

디자이너(문혜빈) : 처음 프로젝트를 받았을 때 낯설었던 건 사실이에요. 여성 브랜드지만 너무 ‘여자여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헤비츠의 여성 브랜드는 좀 달랐으면 좋겠다, 취지에는 저도 공감하지만 실제 그런 디자인 작업은 쉽지가 않아요. 여성성과 남성성이라는 게 생각만큼 평면적인 개념도 아니고, 단계별로 레벨을 조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거든요. 디자인을 구상하려면 먼저 브랜드의 특징을 잡아야 했는데, 헤비츠에서 만든다는 걸 제외하고는 명확한 게 하나도 없었죠.
그러다가 문득, 예전에 다니던 회사 생각이 나더라고요. 비교적 규모가 있는 패션 회사였는데, 디자이너들이 정말 잘 꾸미고 다녀요. 외모에 좀 신경을 쓰는 정도가 아니라,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풀세팅’을 하더라고요. 여성 디자이너라면 그래야만 했고요. 근데 멋진 옷차림과 예쁜 화장이 일하는 데 있어서 정말 중요한 걸까...
물론 저도 아무렇게나 입고 다니고 싶진 않아요. 예뻐 보이는 것도 중요하죠. 하지만 나의 업무 능력과 외모는 별개인 거잖아요. 업무에 방해될 정도의 옷차림도 우스꽝스러워 보였고요. 저는 업무에 온전히 집중하고 싶었고, 그래서 늘 적당한 균형을 찾으려고 노력하던 기억이 났어요.
구심점을 제 자신으로 잡았더니, 디자인 작업이 훨씬 수월해졌죠. 일상적이고 편안한 차림에 잘 어울리는 가방, 내가 늘 메고 싶은 가방을 만들자, 그게 헤비츠와도 공유하는 가치관이기도 했고요. 가장 나다운 게 가장 힘이 있으니까요.





 

젠더리스 디자인의 시작

(김) : 제품이 나오기 시작하고 수정 작업이 진행되자, 브랜드도 조금씩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저를 제외한 모든 팀원이 다 여성이었는데, 늘 그렇듯 초반에는 엇박이 다소 있었죠. 저는 단순하게 안티테제만 가지고 초안을 만들고 있었어요. 개인적으로 미국적인 ‘bad ass’ 코드를 좋아하거든요. 전통적인 여성의 이미지를 뒤집거나 도전하는 데에만 집중했고, 그래서 브랜드 이름도 Ishmael이었어요. 모비딕의 도발적인 첫 문장에서 따온 거였죠.
멋있긴 한데, 솔직히 구닥다리 같잖아요. 말괄량이, 선머슴, 퇴폐... 안티테제도 이미 오랫동안 소비되고 있는 이미지니까요. 페미니즘의 역사가 벌써 백 년이 넘는데, 아직도 이런 이야기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어요. 카논을 벗어나려고 하면, 자기도 모르는 새에 카논에 집착하게 되거든요. 그게 안티테제의 한계죠. 기존의 여성성에 대한 비판은 결국 그것 자체에 관한 이야기가 되니까요.
마엘의 정체성에 대한 논의는 결국 여성성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갔습니다. 정립된 여성성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한창 진행 중이니, 이제는 설득력 있는 진테제가 나와야 했죠. 근데 이건 관찰자의 입장에서 어떻게 결론을 낼 수 있는 가벼운 문제가 아니었어요. 실제로 여성들이 현 상황에 대해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스스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더 중요했으니까요. 그래서 팀원들의 불평을 수집하기 시작했죠.

(문) : 공격적이고 논쟁적인 방식에는 다들 피로감을 느끼는 상태였어요. 사실 저희한테는 성평등이나 인권 이야기가 이미 너무 당연한 부분도 있어서 그럴거에요. 물론 사회적으로는 아직 많은 부분에서 인권 운동이 필요하고, 때로 투쟁적인 방식이 전체 운동의 소중한 동력이 되기도 하죠. 하지만 우리의 일상은 또 다른 이야기예요. 우리 모두는 개인의 삶에서 저마다의 관점을 가지고 있는 성인이고, 이른바 계몽이 필요할 만큼 과거의 프레임에 사로잡혀 있는 세대도 아니죠.
이런 부분을 염두에 두고 보통 여성들의 일상적인 디자인을 정의하는 것도 쉽지는 않았어요. 당연하게도, 저마다 생각하는 균형이 사안마다 조금씩 달랐으니까요. 큰 틀은 모두 동의했지만, 구체적인 사안에서는 다들 개성이 강했죠. 예를 들면 ‘너무 여성적이지 않았으면’이라는 표현에 대해서, 어떤 점이 여성적인 느낌인지, 어느 정도가 지나친 것인지는 정확하게 합의가 되지 않았어요. 결국 채 정의하지 못한 아이디어를 디자인 언어로 해석해야 했죠.

(김) : 아마 헤비츠의 직원들이라 더 그랬을지도 모르겠는데, 의외로 다들 디자인에서 유난 떠는 걸 싫어했어요. 평범한 사람들의 민감한 균형점을 파고드는 브랜드가 없다는 것에 더 집중하고 싶어 했죠. 대놓고 튀는 건 일상에서 부담스럽기도 하고, 자칫 저렴하거나 가벼워 보일테니까요. 하지만 다른 제품과 비슷한 스타일이나, 아주 평범한 디자인은 또 거부했어요. 잔잔한 무드를 유지하면서, 다른 브랜드 제품들에 섞여 파묻히지 않을 정도의 다름을 요구했죠.

(문) : 그래서 수정 작업에서는 디자인 코드를 미니멀리즘으로 잡고, 필요 없는 선과 모양을 제거하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해서 브랜드 테마로 ‘Less’가 등장했죠. 극단적인 미니멀리즘을 달성할 필요는 없었어요. ‘너무 여성적’이지만 않으면 되니까요. 가방을 사용하는 사람이 여성임은 분명히 전제로 해 두고, 전체 모양이나 형식은 여성적인 느낌이 들도록 하되, 필요 없는 디테일을 줄이는 수준에서 디자인을 다듬기로 했죠.





 

온전한 나를 찾는 #stay_be_me 캠페인

(김) : 이 단계에서 저는 캐릭터를 만드는 방식으로 돌파구를 찾고 있었어요. 마침 넷플릭스에서 한창 스탠드업 코미디 프로를 보는 중이었는데, 캐서린 라이언이라는 여성 코미디언에 완전히 반해버렸죠. 그동안 저는 스탠드업 코미디를 매우 남성적인 문화로 봤어요. 실제로 많은 여성 코미디언들이 성공하기 위해 남성적인 어법과 사고방식을 채택하는 경향이 눈에 보일 정도였거든요. 하지만 캐서린 라이언은 매우 지적이고 우아한 태도로 자신만의 영역을 만들었고, 1시간 남짓한 단순한 공연을 예술적 경지로 끌어올렸죠.
덕분에 저는 안티테제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프레임을 반대하면 또 다른 프레임에 갇혀요. 여성성을 재해석하거나 재정의하려고 하면, 결국 성차별 프레임을 답습하게 되는 거죠. 사실 우리는 처음부터 답을 가지고 있었던 셈입니다. 모든 시끄러운 목소리들을 지우고, 온전히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면 되는 거였죠. 진심이 담긴 자기 목소리에는 어떤 힘이 있고, 사람들은 그 매력에 귀를 기울이게 돼요.
이 시대의 수많은 청춘들은 결코 어른들의 목소리에 기죽지 않아요. 물론 절망적인 시스템에 짓눌린 채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지만, 어디서나 자기 목소리를 잃지 않죠. 그 작은 목소리들이 기껏 SNS에 모이는 것이 당장에는 우스워보일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 목소리들이 모여서 촛불이 됐고, 쉽사리 정의되지 않는 어떤 시대정신을 만들어 가고 있거든요. 이 거대한 흐름에 참여한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서로 달라요. 닮은 거라곤, 남이 뭐라고 하건 도무지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뿐이죠.
이런 자유로운 목소리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어요. 온전히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이야말로, 이 북적거리는 작은 지구에서 살아 있는 유일한 방법 같아요.

(문) : 처음부터 디자인 구심점을 ‘나’로 잡았기 때문에, 맥락이 맞아 떨어지고 있었어요. 이번 작업을 온전히 디자이너 콜렉션으로 하자는 제안을 받은 것도 이 시점이었죠. 가장 공을 많이 들인 가방은 비.하이브 숄더백이었어요. 저는 숄더백이 일상에서 가장 편하고 예쁘다고 생각하거든요. 한편으론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디자인이 나와 있는 치열한 영역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라인이나 작업방식 등에 있어서 가장 많이 고민했어요. 첫 콜렉션의 모든 라인이 여기서 시작되고 있죠.
썸팩과 닥터루 브리프는 조금 구분된 가방이에요. 이 가방들은 제가 좀 더 갖춰진 모습을 보여야 하는 직장 여성이라고 상상하고, 활동성과 편리함, 실용성을 모두 고려해서 설계한 가방이에요. 그저 예쁘고 사치스러운 욕망에 충실하거나, 누군가에게 예뻐 보이기 위해 신경 쓰는 여성이 아니라, 자기 일을 사랑하고 성취욕이 충만한 전문 직업인을 상상했죠. 첫 콜렉션이 살짝 시니컬하면서도 지적으로 보이는 건 이 가방들 때문일거에요.


(김) : 브랜드로서 약간의 차별점을 더하기 위해, 좀 더 자신감 있는 태도를 넣기로 했어요. 우리가 상상한 마엘은 자기 주관이 확고한 여성이죠. 포츈쿠키를 형상화한 코드키퍼 사은품은 그런 태도를 보여주기 위한 방법으로 고안된 거에요. 삶에 대한 명언이나, 기발한 시선들이 인쇄되어 나가게 될 거에요. 트위터(@Mahel_radio)도 운영하기로 했는데, 이건 생각만큼 쉽지는 않더라고요. 앞으로 계속해서 발전시켜 나갈 계획이에요.
첫 콜렉션과 연계한 #stay_be_me 캠페인은 우리가 자기 주관을 완성해 가는 데 필요한 과정을 담고 있어요. 심리학적으로 유년기의 상처, 콤플렉스를 딛고 성장하는 과정과 같아요. 문학에서 목표로 하는 진정한 자유의 메타포이기도 하고요. 자유를 찾고 나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반드시 존재의 외로움을 겪게 돼요. 우리가 본질적으로 외로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성장할 수 있는 거죠. 그래서 마엘의 화보는 외롭고 쓸쓸하게 느껴지지만, 그 가운데 홀로 선 여성은 때로 당당하고 자신감 있으며, 때로 황량함이 무색할 정도로 자유롭죠.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은 사람에 따라 다양하겠죠. 그래서 #stay_be_me도 하나의 콜렉션, 하나의 캠페인으로만 소개돼요. 마엘은 앞으로 이 주제를 가지고 다양한 브랜드나 예술가들과 협업을 해 나갈 계획이에요. 그 과정에서 생겨난 다양한 이야기 중에, 아마 우리의 다음 콜렉션도 있겠죠.